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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일상 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 수상작 소개-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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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gcil
조회 563회 작성일 23-09-2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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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복지재단과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최근 ‘제9회 일상 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스토리텔링 공모전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 이야기들을 통해 장애인식개선을 도모하고자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올해에는 한국장애인고용공단과 함께 진행, 기존 일상부문에 고용부문이 추가됐다.

공모전 결과 이음미 씨의 ‘빙산의 일각’ 일상부문 대상, 박수현 씨의 ‘우리의 삶이 해석되는 순간’ 고용부문 대상 등 총 30개 입상작을 선정해 시상했다.

입상작 중 대상 2편, 최우수상 4편, 우수상 9편 등 15편을 소개한다. 열한 번째는 일상부문 우수상 수상작인 정승현의 ‘따로 또 같이’다.

따로 또 같이

정승현

나는 형이다. 나는 형이자 때론 아빠이며 때론 친구다. 우리는 함께 산다. ‘따로 또 같이’

동생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텔레토비’라고 아무리 가르쳐 줘도 ‘텔레비토비’라고 밖에 말하지 못하던 때? 땅에 떨어진 과자를 아무렇지 않게 주워 먹던 모습과 그 모습에 내지른 나의 주먹을 아무렇지 않게 맞던 때? 몇 살 무렵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에 대한 인지보다 미움이 먼저 자라났다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튀고 싶지 않았던 학창 시절 내게 동생이란 누구의 형이라는 주홍 글씨였다.

우린 시골에서 나고 자랐고 여느 집처럼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는 집이었다. 90년대였고 좋은 이웃도 그렇지 못한 이웃도 있었고 좋은 친구도 그렇지 못한 친구도, 좋은 선생님도 그렇지 못한 선생님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동생은 같은 학교 병설 유치원에 입학했고 그때까지도 동생은 대소변 가리는 것을 잘하지 못 했던 듯싶다. ‘그렇지 못한 선생님’이 검은 봉지에 싸서 우리 반 교실로 가져다주곤 했으니까. 검은 봉지를 어디에 버려야 하는지 몰라 난감해하는 동시에 동생을 씻기러 가야 했기에 나는 바빴나 보다. 스쿨버스를 놓쳐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나는 누구를 원망하며 울었나, 그에 대한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튀고 싶지 않았다. 특별하고 싶지도 않았다. 동생이 초등학교로 올라오자 당연한 듯 특수반에 들어가게 됐고 나는 특별한 형이 되었다. 나는 자꾸 특별해지는 게 싫어서 학교에서 최대한 동생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피하지 못하는 순간들도 오게 된다. ‘그렇지 못한 친구’에게 맞고 우리 반으로 울며 찾아온 동생을 보며 형 노릇을 피할 순 없으니까. 몇몇의 녀석을 몇 번인가 패주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졸업하고 형 없는 학교생활을 이어갈 동생이 늘 걱정이 되었다.

나는 아빠를 존경하고 좋아했다. 아빠는 내게 아빠이며 때론 친구이며 때론 엄마이기도 했다. 엄마 역시 특별해서 평범한 엄마 역할이 힘든 사람이었고 내게는 평범한 아빠만이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이었다. 특별한 엄마와 동생과 집에 있노라면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아빠의 오토바이 소리는 늘 반갑고 청량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랬던 아빠에게 처음 대들었던 것은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이었다.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이제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됐다는 말이니까.

나는 동생이 고등학교에 가지 않기를 바랐다. 의무교육도 중학교까지고 어차피 대학을 갈 것도 아닌데 왜 학교에 보내느냐는 게 내 주장이었다. 기실은 또다시 붙게 될 누구의 형이라는 꼬리표와 누구에게 맞고 울면서 찾아오는 동생의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에 신물이 났다. 게다가 초등, 중학교와 달리 선배들은 더 무서웠고 나는 더 예민해진 나이였으니까.

그렇지만 아빠는 완강했다. 그렇게 단호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내게 반항이란 낯설고 아빠의 단호하고 날이 선 모습은 더 낯선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교까지는 마치게 하자고 동생도 나도 같은 자식이라는 아빠의 말, 그리고 동생도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는 그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렸지만 불퉁스러운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가족도 시골도 모두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뒤늦게 공부를 했다. ‘대학을 가자, 그것도 멀리 서울로’ 이게 나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바람과 달리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엔 붙지 못했고 집에서 가까운 광역시에 있는 한 대학에만 붙었다. 혹시 몰라 떨어질 걸 대비해 넣은 원서였지만 기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대학을 포기하고 서울에 있는 사촌 형이 다니던 회사에 취직을 하기로했다.

해방감이었을까. 스무 살이 으레 그렇듯 나는 푸릇푸릇했고 자유로웠고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다. 처음 해보는 화려한 도시 생활에 한껏 고양되었다. 서울에 적응해감에 따라 점점 고향 집에 내려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아빠와 엄마와 동생이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도 점점 희미해졌다.

엄마가 아프다는 얘기, 동생이 졸업하고 집 근처 공장에 취직하게 됐다는 얘기, 공장에 취직시키기 위해 아빠가 많이 고생했다는 얘기. 나는 멀어진 몸처럼 시골에 있는 가족들 얘기가 점점 먼 곳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구석의 걱정과 책임감을 애써 모른 척했다. 돌아보면 그곳의 일들이 내 일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아빠가 돌아가셨다. 교통사고였고 내가 몇 개월 만에 내려온 그날 밤이었다. 운명은 장난처럼 나를 다시 시골로, 가족 곁으로 불러들였다.

슬퍼만 하기엔 할 일이 많았다. 아버지의 신변 정리 이후 엄마와 동생을 데리고 병원을 다녔다. 이전까지 되어있지 않던 장애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 동생의 병역 문제도 걸려있었고 나 역시 그랬지만 여러모로 필요한 일이었다. 진료를 통해 어머니와 동생에게 지적장애 3급이라는 진단이 내려지고 얼마 후 장애인증을 발급받았다. 처음으로 내 가족의 장애에 대한 실감을 한 날이었던 것 같다. 적응하지 못해 퇴사하게 된 동생의 일자리도 알아봐야 했고 아빠의 부재로 통제가 되지 않는 엄마와 동생도, 살림도 꾸려가야 했다. 이 일련의 과정은 힘들고 외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내가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동생에게는 나쁘지 않은 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어른도 아니었고 그들을 이해하거나 내 책임을 다하지도 못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존재가 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얼마나 큰 버팀목이었는지, 엄마와 동생이 세상에 느끼는 어려움과 고통이 얼마나 크고 외로운 것인지를 나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몇 년 후 엄마마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이제 집에 동생과 나 둘만이 남았다. 동생은 집에서 가까운 휴게소에서 일을 하고 나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동생은 라면과 김치찌개 등을 끓이며 한식 코너에서 일을 하는데 꽤 만족하며 다니고 있는 듯하다. 가끔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들을 볼 때도 있다며 자랑하기도 하고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며 음료수를 사주고 가는 손님도 있다고 한다. 내게도 집에서 라면을 곧잘 끓여주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전문인이 만들어 준다는 생각에 왠지 더 맛있게 느껴진다.

여전히 동생에게 세상은 쉽지 않다. 지금도 이따금씩 ‘그렇지 않은 손님’ 때문에 혹은 동료 때문에 울먹이며 내게 전화를 걸어올 때가 있지만 이제는 달려가서 패줄 수가 없다. 대신 퇴근길에 괜찮은 안주와 넉넉한 맥주를 사 온다.

나는 이제 어렴풋이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어설프게나마 동생의 진심을 들여다본다. 동생을 어떻게든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하고자 했던 마음과 ‘그렇지 않은’ 친구나 선생님이 있음에도 학교를 다니고 싶어 했던 동생의 그 마음을 말이다.

우리는 함께 산다. ‘따로 또 같이’ 갈등과 반목과 용서와 이해와 연민과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들을 지나 이제 우리는 괜찮은 한패다. 물론 우리는 남들보다 안주와 맥주 값에 돈을 더 쓰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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